호암자전
어려서부터 가장 좋아하는 책은 첫째도 둘째도 전기(傳記)였다. 그런 나에게 어떤 사람들은 종종 “왜 남의 자랑섞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냐. 남의 삶을 부러워 말고 너만의 삶을 살아라”라고 충고한다. 독서 취향이 나와 다른 것은 어찌 못하지만, “나만의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으로써 전기 문학 읽기가 옳지 못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만의 삶을 훌륭하게 개척해가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창의력을 강조할 때면 “think out of box”라고 떠올리고, 그에 따라 “the box”를 무조건 피해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오류와 같다. 창의력이란 사실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보다는 다양한 모습의 박스를 관찰한 상태에서 주어진 상황에 꼭 알맞는 모양의 박스를 고안해내는 것에 가깝다.
전기문학 읽기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내가 이번에 호암자전을 읽었다고 해서 대구에 내려가 건어물 가계를 열 것도 아니고, 마산에 내려가 정미소를 차릴 것도 아니다. 그와 내게 주어진 환경이 다르다. 그러나 세상에는 강산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반복되는 것들 많다. 가령 그는 현대 경영학이 가르치는 많은 핵심들을 자문자답을 통해 스스로 터득했는데, 그 철학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우선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시장과 소비자(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국가와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과 스스로 제공할 여력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고, 조사를 통해 깊이 알아보았다. 사업을 운영할 때에는 최고의 인재를 까다롭게 선발하고, 한번 기용한 인재는 ‘의인물용, 용인물의’의 정신으로 전적으로 신뢰하고 일을 위임하였다. 그렇게 쌓은 부를 축적해 놓았다가 다음 단계의 산업으로, 즉 무역업에서 경공업, 경공업에서 중공업, 중공업에서 첨단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투자하였다. 개인적으로 축적한 자산은 본인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에 투자했는데, 언론, 문화, 박물관과 교육재단 설립 등이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심오한 내용은 아니지만 경영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고, 특히 그의 삶의 궤적을 보면서 나 또한 그의 이런 저런 모습을 본 떠 내가 꿈꾸는 미래에 적용시켜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와 사회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음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덤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삶을 읽는 내내 되새긴 하나의 사실은, 역시 자신의 뜻, 혹은 비전을 현실화 하는 것에 있어서 사업가 만한 직업이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업가는 비전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비전은 사업가를 통해서만 현실화 된다. 물론 어떤 비전이 정치적으로 현실화된 경우도 많이 있으나, 그것이 힘을 얻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업 부분의 협조가 따라야 한다고 본다. 또한 현대 사회의 변화는 사업가를 통해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본다.
어쨌든 그는 항상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 때마다, 해당 사업의 상세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그 비전과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상세한 준비 덕분에 국가, 기술과 자금을 빌려주는 외국관계자, 회의에 찬 삼성 직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가령 그는 다음 단계의 산업에 도전할 때마다 반대에 부딪혔다고 밝혔는데, 반도체와 같은 첨단산업에 진출하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주변의 의심과 만류에, 그는 “산업의 쌀인 반도체가 없으면 삼성의 미래도 한국의 미래가 없노라”고 비전을 분명히 밝혔다. 그것이 현실화된 지금을 보면 너무나 옳은 결정이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부분을 두 가지 정도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이것이 자서전이라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삶을 스스로 이 정도로 복구해낼 수 있는 것도 대단한 일이며,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그의 삶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스티브 잡스나 워렌버핏의 경우 자신이 전기작가를 ‘직접’ 선정한 뒤, 그들이 자신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을 마음껏 인터뷰하도록 했고, 관련된 자료들을 모두 제공해주었다. 또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책을 보여줄 필요도 없으니 좋은 것 나쁜 것 다 적으라고 지시하거나(스티브 잡스), 내가 말한 것과 다른 이가 말한 것 중 상반되는 것이 있다면, 덜 화려하고 일반적인 것으로 택하라(워렌 버핏)고 지시했다. 덕분에 공신력없는 작가가 작성한 전기보다 훨씬 믿을만 하면서도, 보다 깊이 있고도 전체적인 관점으로 그 사람과 당시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책이 되었다는 점에서, 배우기도 많이 배웠지만 재미있는 독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전기가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될 만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고, 그들이 되도록이면 자서전 보다는 이렇게 제3자의 시각을 통한 전기를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두번째도 비슷한 맥락인데, 삼성을 이해하기 위한 전체적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제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점이다. 부정축재자로 비난 받은 사실이나 사카린 밀수사건 등에 대해서 언급되는데, 내가 이런 사건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없다보니 그의 입장 그대로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그의 의견이 거짓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시각과 밖에서 삼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 하나의 상황을 서로 다르게 해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나의 기업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도 삼성을 둘러싼 다양한 평가,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관련 책을 찾아보았으나 당장 필요한 공부가 될 것 같지는 않아 미뤄두었다. 다만 삼성을 일으키고 키워온 사람이 삼성에 대해서 가졌던 꿈은 무엇이었으며, 그가 해석한 삼성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겠다.
편집에 대해서도 아쉬운 점이 있어 책을 받자마자 불만을 담아 페이스북과 Yes24에 올렸다. 뜻밖에 Yes24에서 해당 글을 내리면서 나남출판사의 사장이자 주간인 분의 나의 글에 대한 반론을 담아 보내주었다. 책의 부피와 한자 병용에 대한 불만이었는데. 책의 부피에 대해서는 여전히 필요이상 크다는 생각이지만, 불만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다. 한자 병용에 대해서는 그가 ‘기본적인 한자 조차 모르는 젊은 세대를 위함’이라고 밝힌 취지 그대로 도움을 얻었다. 다양한 한자 표현에 노출되었고, 나도 모르게 궁금해져서 옆에 적힌 한자를 참조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나이가 드는 만큼 앞으로는 더 신중하게 글을 쓰고 공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계기였다. 발간하자마자 그딴 글이 올라오니 관계자분들이 꽤나 불쾌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죄송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끝으로, 이병철에게 일본은 항상 배움의 대상이자 따라잡아야 할 대상이었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미우긴 미워도 배울 것은 배우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배우는 사람의 자세이고 미래가 있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까. 그 뿐만 아니라 스티브잡스에게도 소니(Sony)가 영감의 원천이었으니 무엇을 더 덧붙히겠는가. 분명히 배울 것이 많은 나라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독서는 그동안 미뤄왔던 독서, 일본의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의 책을 읽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또 나남출판사의 책이다. 기대된다.